역사인문

역사 연혁 
  
    길림지역의 형성은 유구한 역사적 발전 과정을 거듭하였다. 진나라 통일 이전의 선진 시대로부터 길림은 역대 중앙정권으로부터 행정 관할 지역으로 편입되었다. 일찍이 한나라 시기에 군과 현을 설치하였고 당나라 발해 및 그 이후의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등 각 역사적 시대에 걸쳐 부, 주, 현을 설치하였다. 명나라 시기에 도사, 위소를 설립하였다. 기원 1653년(청나라 순치 10년)에 청정부는 녕고타앙방장경을 설치하였는 바, 이는 길림성 설립의 첫 시작이라 하겠다. 이는 길림성의 초기 형태이고 길림 발전사의 이정표가 되는 것이다. 기원 1662년(청나라 강희 원년)에 녕고탑장군으로 개칭하였다. 기원 1673년(청나라 강희 12년), 조선소(오늘날의 길림시)를 길림성으로 건설하였다. 이는 역사적으로 “지린우라”(만주어, “강 연안”이라는 뜻)로 일컫는 바, 길림은 바로 이로서 붙여진 이름이다. 기원 1676년, 녕고탑장군은 길림성으로 옮겨졌고 기원 1757년, 녕고탑장군을 길림장군이라고 개칭했다. 이때로부터 “길림”은 기존 도시읍의 명칭으로부터 행정구역으로 확대되었다. 기원 1907년(청나라 광서 33년)에 길림행정기구를 공식 설치하였다.
   
    청나라 전기, 길림은 줄곧 봉쇄되었고 사회경제발전이 둔화된 상황이었다. 청나라 중 ∙ 후기부터 점차 해금하여 경제적 발전을 이룰 수가 있었다. 20세기 초, 동북지역은 러시아와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지 확장을 위해 무력으로 싸우는 지역이 되었다. 5∙4운동의 추진과 5∙30운동의 영향 하에 길림대지는 반제국주의 ∙ 애국투쟁의 풍조를 불러일으켰다. 민족적 상공업이 일정한 발전을 가지게 되었고 근대 규모를 갖춘 도시가 잇따라 출현되었다. 1931년 9∙18사변 후 길림은 일본의 식민지로 몰락하였다.
 
  
위만주국 


     1931년, 일본제국주의는 공공연히 9.18사변을 일으키고 중국 동북 지역을 점령하였다. 1932년 3월 위만주국 괴뢰 정권을 세웠다. 부의가 집정하고 연호는 “대동”이었다. 장춘을 “신경”으로 개명하고 위만주국 “수도”로 정하였다. 1934년, 일본은 “만주국”을 “만주제국”으로, “집정”을 “황제”로, 연호 “대동”을 “강덕”으로 개명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고 8월 18일에 부의가 통화에서 퇴진을 선언하였다. 이로서 만주국이 멸망되었다.
 
    길림해방
  
    동북해방전쟁 시기,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동북민주연군(이후 동북인민해방국이라 부름)이 길림의 대지에서 국내외를 놀랍게 한 “사전사평”, “사보임강”, “삼하강남” 등 전투를 펼쳤고 동북 전세가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1948년 요심전역이 시작되자 동북인민해방군은 장춘을 포위하여 강력한 정치적 공세와 군사적 압력을 가함으로써 장춘 주재 국민당 부대를 해방군에 항복시켰다. 이로서 길림성 경내는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초기, 길림성의 관할 지역은 2개의 시, 2개의 전문 구역, 1개 기, 22개의 현과 1개의 공업 특별구가 있었다. 1954년, 동북행정구역 조정을 거쳐 원 흑룡강성의 7개 현을 길림성에 귀속시켰고 원 길림성 소속인 건안현을 합쳐 백성 전문 구역으로 편성하였다. 원 요동성의 1개 시, 9개 현을 길림성에 귀속시켜 통화 전문 구역을 편성하였다. 원 요동성의 요원시, 서안현, 동풍현과 원 요서성의 사평시, 쌍료현, 이수현을 길림성 관할 지역으로 귀속시켰다. 같은해, 길림성인민정부가 길림시에서 장춘시로 옮겨졌다. 1969년, 내몽골자치구의 처리무멍과 후룬베얼멍의 1개 현, 1개 기를 길림성에 귀속시켰고 1979년에 다시 내몽골자치구로 귀속시켰다. 이때로부터 길림성 행정구역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유명인물 


  용감하고 꿋꿋한 길림 인민은 반제국주의 반봉건 투쟁의 영광스러운 전통을 지니고 있다. 러시아, 일본 등 식민주의, 제국주의의 야만적인 침입에도 불구하고 길림인민은 난폭한 세력과 과감하게 싸움으로써 중화민족 불굴의 투쟁정신을 충분히 고양하였다. 특히는 일본제국주의와의 투쟁에서 길림인민은 과감히 항일하고 용감히 멸적하였다. 동북이 침략된 초기, 왕덕림, 당취오, 왕봉각 등 항일의용군, 양정우, 위증민, 왕덕태가 리더하는 동북항련1로군의 피어린 싸움, 길림 인민은 선혈과 목숨으로 기개가 드높은 애국주의 역사의 장을 기록하였다.

  원정우의 본명은 마상덕, 하남 확산 출신이다. 1905년에 태어났고 1927년 6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확산농민폭동, 유점추수폭동의 주요 영도자이다. 1929년 여름, 동북 지역의 혁명활동에 종사하였고 장관일을 가명으로 하였다. 1932년 9월, 양정우는 만주성위원회 군사위원회 대리 서기를 맡았고 11월에 반석, 해룡 등 지역으로 순찰을 떠났으며 중국공농홍군 제32군 남만유격대를 편성하였다. 이듬해 초 남만유격재 정치위원을 맡고 양정우을 가명으로 하였다. 양정우는 기타 항일무장대오와 함께 전투하고 선후로 항일군연합 참모부, 항일연군 총지휘부를 세웠다. 양정우가 직접 영도한 남만유격대는 규모가 날로 확대되어 동북인민혁명제1군 독립사, 제2군, 동북항일연군 제1군으로 재편성되었다. 1936년 6월, 동북항련 제2로군이 설립되었고 양정우가 총사령 겸 정치위원을 겸하였다. 제1로군은 6000여 명에 달했다. 길림, 요녕 동남부 산간 지역에서 양정우는 산림과 “밀영”에서 선후로 괴뢰 정부 부대를 소멸하였고 일본 괴뢰 부대를 여러번 “대토벌”하였으며 노령철도 터미널 공정 습격전, 장령매복전, 차거우습격전, 불더미 등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당중앙과 연락을 취하고자 2차례에 걸쳐 서부로 토벌 출병하였다. 7.7사변 후에도 전국 항일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양정우는 공적이 탁월하여 선후로 중화소비아트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중공7대준비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되었다. 1938년 7월, 반역자의 배신으로 1로군은 중대한 손해를 입었고 양정우는 부대를 3개 군으로 재편성하여 전투를 계속하였다. 1940년 2월 23일, 상처와 굶주림에 시달린 양정우는 일본 괴뢰군과 정우현 보안촌 삼도와이즈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이다가 적군의 총에 맞아 장렬하게 희생하였다. 그때 나이는 겨우 35살이었다. 적군은 그의 유골을 해부한 결과, 속에 든 것이 나무껍질과 풀뿌리, 목화솜뿐이었다. 적군도 양정우의 영웅 절개에 고개를 수그릴 수 밖에 없었다.

   위증민의 본명은 관유위, 자는 백장이고 일명 위민생, 위서갱, 이신량, 장달, 풍곤, 풍강 등이다. 1909년 2월 3일, 산서성 툰유현 위촌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1926년에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염석산 군벌 반대의 혁명활동에 참가하였고 1929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5년 2월, 중공만주성위원회의 파견을 받고 동만(지금의 연변 지역)으로 파견되어 중공 동만특별위원회 서기를 맡았다. 1936년 7월, 동만, 남만 김천하리(지금의 통화지역)를 조직하여 중공 남만성위원회에서 성위원회 서기 직을 맡았다. 위증민은 길림성의 첫 성위원회 서기이고 선후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정치위원회,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정치위원회, 동북항련 제1로군 부사령과 총정치부 주임 등 직무를 맡았다. 1941년 3월 8일, 반역자의 밀고로 적군이 대군을 집결하여 화전현 사도구 항련밀영을 불의 습격하였고 중병을 앓고 있는 위증민은 7명의 항련전사와 함께 힘차게 반격했지만 적군의 총에 맞아 장렬하게 희생하였다. 
 
  
   왕덕태, 요녕 영구 출신으로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1931년 9.18사변 후 항일투쟁의 대오에 들어섰다. 같은해 겨울, 현지의 “추수투쟁”에 가입하였고 연길현 반제동맹조직부 부장을 맡은 후 곧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2년, 연길항일유격대에 참가하였고 선후로 유격대 소대장, 중대장, 참모장 등 직무를 맡았으며 연길유격대의 주요 설립자이자 영도자 중의 하나이다. 1933년에 유격대 작전을 50여 차례 참여 및 지도하고 적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연길유격대는 전투 과정에 그 규모가 300여 명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오우구, 석인구, 삼도만 등 항일유격근거지를 개척하였다. 1933년 6월에 중공 동만특별위원회위원으로 선정되었고 군사부 부장을 담당하였다. 1934년 3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편성에 참여하였고 정치위원을 담당하였다. 같은해 6월, 중공 동만특별위원회 임시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그 이후로 특별위원회와 독립사의 기타 영도자와 함께 대규모의 유격전을 벌였고 연길, 안도, 왕청, 돈화 등 지역에서 새로운 유격지를 개척하였다. 1935년 3월 하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는 구조 조정을 했고 사단장으로 전임되었다. 1935년 5월 30일,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으로 확대 편성되고 군단장으로 승임하였다. 관할 부대가 4개 단, 총 병력은 약 1200여 명에 달하였다. 1936년 3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이 동북항일연군 제2군으로 개편되고 왕덕태는 군단장을 연임하면서 부대를 이끌고 안도, 돈화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36년 6월, 항련제1, 제2군이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으로 합병하여 왕덕태는 제2로군 부총사령관 겸 제2군단장을 겸임하였다. 이와 동시에 중공 남만성위원회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왕덕태는 작전 지휘 시 지략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군사 기술력도 매우 뛰어나다. 보총, 권총, 기관총에 능숙하고 백발백중이며 몸소 병사의 선두에 나서서 용맹하게 적들과 맞선다. 1936년 11월 초, 임강, 무송 교차지인 대양차에서 2개 중대의 괴뢰군을 포위하여 적군이 투항하도록 하였다. 그 이후 항련제2군 제4사 제1단, 제2단 3련과 제6사 1부를 인솔하여 무송, 임강 변경에 있는 소탕하촌에서 2군간부회의를 개최하여 새로운 병력 배치를  연구 확정하였다. 11월 7일 아침 7시, 600여 명에 달하는 적군의 습격을 받았다. 그는 4사와 6사의 일부 전우들과 함께 적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오후 3시, 도망가는 적을 추격하는 중에 불행하게도 총에 맞아 희생하였다.
  
    진한장, 1913년에 길림성 돈화현에서 태어났고 1933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동북항일연군 후기 영도자 중의 하나이다. 9.18사변으로 일본 제국주의는 우리나라 동북삼성을 침략하였다. 교육사업에 종사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진한장은 국가와 백성의 운명을 걱정하여 항일구국운동에 나섰다. 그는 “나라가 망하면 어이 집이 안녕하옵니까? 굳센 사나이로서 어이 외족의 노예로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라고 말한 적이 있다. 1932년에 길림구국군에 가입하여 일본침략군을 물리쳤다. 포화 속에서 진한장은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구국군 총 참모장, 공산당원인 주보중의 유능한 조수가 되었다. 1934년에 항일연군 설립에 참여하였고 그 이후 항련제5군 제2사 사단장, 제3방면군 지휘자를 맡았으며 부대를 이끌고 간고한 경박호 지역에서 일본 침략군을 물리쳤다. 일군은 번번히 군사 “토벌”을 벌임과 동시에 항련과 진한장을 상대로 정치적 유혹을 가했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1940년 12월, 엄동설한에 폭설로 산이 봉쇄되었다. 한 차례의 전투에서 반역자의 배반으로 진한장과 전우들은 적군에게 포위되었다. 적군은 “항복해라, 진한장. 항복하면 큰 벼슬을 줄 테다”라고 웨쳤지만 진한장은 “죽어도 매국노가 되지 않으리다”하며 복수의 탄알을 적군에게로 돌렸다. 결국은 중과부적, 탄약과 식량이 전부 떨어져 진한장은 피바다에 스러져 장렬하게 희생하고 말았다. 그때 나이 27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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